책찌개/감성독후감

[감성독후감]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어떤 글도 정치·종교적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글로밥상 2020. 12. 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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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밥상=글로 나아가는 이]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느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 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나는 왜 쓰는가 中, 조지 오웰 

 


 

언젠가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소설 하나. 전체주의를 비판한 책이었다. 생각보다 잘 읽히진 않았다. 번역 때문인지, 내 집중력이 사고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오웰의 사고는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어떤 글도 정치·종교적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처음 봤을 땐 꾀 충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가 간다. 신입기자로 활동하며 어떤 글쓰기도 특정한 목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흔한 기사글도 겉보기에는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기자의 시각과 가치판단이 들어있다.    

 

고로 오웰이 쓴 위 문장은 글쓰기의 본질을 깨달은 이들에겐 당연한 말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왜 쓰는가 中,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 출판)’는 오웰의 ‘자전적 수필’을 모은 책이다. 오웰이 젊은시절부터 경험한 삶의 단면을 담아냈다.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아마 변역에서오는 언어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웰만의 독특한 시각과 사고를 담았다. 그의 문장들은 잘 포장된 선물 꾸러미가 아닌, 거칠게 뜯겨 들판에 버려진 한 마리 들소의 시체들 같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대단히 문명화된 인간들이 내 머리 위로 날아다니며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며,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흔히 말하듯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인 것이다. 나는 그들 대부분이 사생활에서는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꿈도 못 꿀 선량하고 준법정신 투철한 시민임을 의심치 않는다. 반면에 그들 중 하나가 폭탄을 잘 떨어트려 나를 산산조각 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가 그 대문에 특별히 잠을 못 이룰 리도 없을 것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힘을 갖는다. 

 

-나는 왜 쓰는가 : 영국, 당신의 영국 中, 조지오웰 

 

거대한 조직과 질서 안에서 다수의 행동은 합리화된다. 오웰은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사상과 질서를 비판했다. 소수의 권력이 집단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보여주었다. 전쟁 속에서 한 인간은 소총 한 자루와 별 다를 바 없다. 문명 속에서 인간은 존재해왔고, 문명을 개발한 똑똑한 인간은 다수의 (멍청한) 대중을 지배해왔다. 

 

정치든 종교든 사업이든 기득권(여기서의 기득권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을 가진 쪽이 언제나 ‘선’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소름돋을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다. 너무 익숙하지만 그 내막을 알게되면 구역질이 날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어떤 전통을 가진 계층에 속해 있었고,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몸 바칠 의무를 으뜸가는 계율로 삼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들은 실은 동포들을 약탈해 먹고 산다고 허더라도 스스로 진정한 애국자라 '느껴야만' 했다.

 

그들의 탈출구는 딱 하나뿐이었으니... 바로 어리석어지는 일이었다. 그들은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사회를 기존의 양상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눈을 과거에 고정시키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관심을 갖지 않는 덕분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 中, 조지오웰  

 

대부분의 인간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인 인간이기에 오직 인간 세계에 머무르려 한다. 인간이 만든 재앙에도,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큰 인간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사회에 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어리석어져야 한다. 이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리석음의 단계는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앎’을 포기하는 삶이다. 가장 많은 인간이 머무르는 세계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생계와 질병,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속해 있다. 

 

둘째, 알지만 외면하는 삶이다. 첫 단계에서 한 발짝 나아간 이들이 선택한 어리석음이다. 이 단계에 속한 자들은 고민이 많다.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지만 계속 부딪히기 때문이다. 격렬히 저항하기에는 두렵고, 그러지 않기에는 양심이 가슴을 찌른다. 필자 또한 이 단계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저항하는 삶이다. 물론 이 단계에 있다고 해서 살림살이가 전자들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정신과 사고가 좀더 깊을 뿐이다. 이들은 저항을 위해 때론 폭력과 혁신을 서슴치 않는다. 좋든 나쁘든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갈 때는 늘 이들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제목미상 

-조지 오웰

 

위병소 탁자 곁에서

내 손을 잡아준 이탈리아 병사

억센 손과 허약한 손

만날 수나 있었으랴.

 

총성 울리는 곳 아니었다면.

하지만 아, 얼마나 평화로웠던가!

초췌하지만 어떤 여인보다 맑은

그 얼굴 바라보며!

 

나를 토하게 만드는 구더기 끓는 말들

그의 귀엔 성스러웠고

내가 책으로 더디 배운 것들

그는 나면서부터 알고 있었으리.

 

못 믿을 총이야 제 할 말을 했고

우리 둘 다 속아서 샀지만

내가 산 모조금붙이는 진품이었으니-

아! 누군둘 예상이나 했으랴?

 

행운을 빈다네, 이탈리아 병사여!

하지만 행운은 용감한 자의 것이 아니니,

세상이 그대에게 무얼 갚겠는가?

그대가 준 것보단 언제나 적으리.

 

그림자와 망령 사이에

하양과 빨강 사이에

총탄 거짓 사이에

그대 어디다 고개 숨길까?

 

마누엘 곤살레스가 어딨는지,

페드로 아길라르가 어딨는지,

라몬 페네요시가 어딨는지,

지렁이는 알지니.

 

그대의 이름과 행적은

그대 뼈 마르기 전에 잊혀지고.

 

그대를 살해한 거짓은

더 깊은 거짓 아래 묻히리니

 

그러나 그대 얼굴에서 내가 본 것

어떤 힘도 앗아갈 수 없으리니.

수정 같은 그 정신

어떤 폭탄도 흩지 못하리니. 

 

필자는 오웰이 말한 ‘글쓰기의 목적’이 이 시에 고스란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은 거짓과 폭력 속에서 언제나 죽어갈 수 있지만 정신, 수정 같은 정신은 그 어떤 폭탄도 흩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기독교의 경서인 성경의 이 구절과 통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성경, 마태복음 10장 28절)”

 

그렇다. 끝없이 사고하며 선과 악을 구별하는 자들에게 거대한 폭력과 거짓의 그림자는 쉽게 드리우지 않는다. ‘선한 양심’에 근거한 생각은 밝은 빛과 같다. 

 



전체주의의 요구에 맞서 지적 자유를 지키려고 하다보면 앞서 열거한 유의 논박들과 어떤 식으로든 부딪히게 된다. 그러한 모든 질문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왜’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작가를 단순한 엔터네이너로, 아니면 거리의 악사가 곡을 바꾸듯 쉽게 선전 내용을 바꾸는 타락한 글쟁이로 여긴다. 하지만 책이란 게 과연 어떻게 씌어지는 것인가? 아주 낮은 수준이 아닌 이상,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 단순한 저널리스트와 가장 ‘비정치적’이고 창의적인 작가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나는 앞서 언급한 리조트 같은 것이 지금 이 세계 전역에서 수백군데는 계획되고 있거나 어쩌면 이미 지어지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정대로 다 완성될 것 같지는 않지만(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그렇다), 그것들은 분명 현대 문명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행락(쾌락)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을 아주 충실히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 유의 관념은 초대형의 댄스홀이나 극장, 호텔, 레스토랑, 호화 유람선 같은 데서 이미 부분적으로 구체화된 바 있다.  호화 유람선이나 ‘리용 코너 하우스’에 가보면 그런 미래의 낙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다. 분석해보면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도 혼자 있는 법이 없다.

2. 아무도 자기 힘으로 뭘 하는 법이 없다.

3. 어떤 종류의 야생 초목이나 자연경관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4. 빛과 온도는 항상 인공적으로 조성된다.

5. 아무도 음악 소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음악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인데, 가능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음악을 들어야 한다. 음악의 기능은 생각과 대화를 막는 것이며, 만약 음악이 없다면 끼어들게 될 새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라디오를 이용하고 있다. 영국의 아주 많은 가정에선 라디오를 그야말로 아예 끄지를 않으며, 이따금 조작하는 경우란 계속해서 경음악만 나오게 할 때뿐이다. 식사를 할 때에도 라디오를 줄곧 틀어놓고는, 음악소리만큼 목청을 계속 돋우어 둘 다 제대로 안들리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여기엔 뚜렷한 목적이 있다. 음악은 대화가 심각해지거나 심지어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맏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사람들의 말소리는 음악을 경청하지 못하게 하며, 그럼으로써 생각이라는 끔찍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막는다. 이유는 이렇다.

 

조명이 절대 나가선 안된다.

음악은 언제드 들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를테니까

행복해본 적도 즐거워본 적도 없는,

어둠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귀신 나오는 숲에서 길을 잃었으니까. 

 

-나는 왜 쓰는가 中, 조지오웰  

 

‘도심의 숲’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불과 100년이 되지 않았다. 숲은 원래 자연(者燕)에서 왔다. 필자는 자연을 ‘신’이라 부른다. 그 누구에게도 만들어지지 않은, 스스로 있었던 존재. 인간의 숲은 교묘하다. 마치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화려하게 포장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먹을 수 없는 화학물질의 복합체일 뿐이다. 초대형 댄스홀, 거푸집 형태의 아파트(21세기에 들어 ‘아파트’는 인간의 개인화를 극명히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됐다), 수백억을 넘나드는 스포츠카까지, 슬프게도 이들은 인간의 살속에 단 1%도 녹아들 수 없는 물질일 뿐이다. 

 

2020년 스마트폰은 각 인간을 도시화시켰다. 그 어떤 연인보다 매력적인 이 녀석은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여한다. 그리고 대화마저 감시·차단한다. 대단히 신기한 건, 대부분의 인간이 이에 대해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길을 걷다가 전철을 타거나 하면 정말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지만, 이는 더 이상 충격이 아닌 현실이다. 

   


 아무튼 봄은 이곳 런던 N1 지구에도 찾아왔고, 우리가 봄을 향유하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새삼 흐뭇한 일이다. 나는 두꺼비들이 짝짓기를 하거나 토끼 두 마리가 덜 여문 옥수수를 두고 권투시합을 벌이는 광경을 보고 서 있으면서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나의 즐거움을 막고자 할 중요한 사람들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해보았던가.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다. 우리가 딱히 아프거나, 배고프거나, 공포에 떨고 있거나, 감옥 또는 행락지에 갇혀 있지 않는 한, 봄은 여전히 봄인 것이다. 공장엔 원자탄이 쌓여가고, 도시엔 경찰이 어슬렁 거리고, 확성기엔 거짓말이 넘쳐 흐른다 해도,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아무리 못마땅한들, 독재자도 관료도 그것을 막을 순 없다.

 

-나는 왜 쓰는가 : 두꺼비 단상 中, 조지오웰

 

여기까지가 톨스토이 팜플렛의 요지다. 이에 대한 우리의 첫인상은, 그가 셰익스피어를 형편없는 작가로 묘사하면서 병백한 허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셰익스피어든 다른 어느 작가든 ‘훌륭한’ 작가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즐거나 논거 같은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위윅 디핑을 ‘형편없는’ 작가라 확실히 증명할 방법도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론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 생존이야말로 그 자체로 다수 의견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인 것이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中

 

 

벌써 100년이 다 되어가는 오웰의 문장들. 그가 우려했던 모습은 지금 이 세상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염세주의로 가서 “결국 이 지구촌은 인간의 욕심속에 패망하고 말 것”이라고 비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크나큰 재앙을 만난 이 시점에,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시각이 조금은 빠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세상이 어쩔 수 없이 이리 흘러왔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분명히.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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