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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마·라] 6.25전쟁 70주년 특별 인터뷰] 6.25 前과 後,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하다

글로밥상 2020. 11. 1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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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밥상=글로 나아가는 이] 

한여름 장맛비가 거세다. 한반도는 짙은 안개와 함께 6·25전쟁 70주년을 맞았다. 최근 북한 정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현 남한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는 오랜 한반도 분단역사 속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한국전쟁 70주년, 하루가 지난 어제 25일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 147위가 머나먼 길을 돌아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평화를 기렸던 남북관계는, 작두 위에 선 무당의 붉은 발처럼 여전히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전쟁은 ‘전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픔의 앞과 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않는 기자로선, 97세(1924년 출생) 백발 어르신의 파란만장한 삶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6.25 참전용사인 최 어르신은 무려 67년이 된 빛바랜 전역수첩을 꺼내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진=최 어르신

Q.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얘기를 해볼게요.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이남 사람이 아니라, 이북 황해도 신천군 남부면에서 났어요. 안중근 의사 알지요? 그분이 우리 집에서 20리(8km) 떨어진 곳(황해도 해주)에서 살았어요. 그 텔레비전(TV)에 나오는 ‘송해’도 우리 동네서 가까운 (황해도) 대령군이 고향이에요. 대령(군)에 가면 동산이 있는데 거기는 미군(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어요. 거는 미국 영토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어머님의 고향이 대령이었어요. 

 

국민(초등)학교 때 서울에 수학여행을 왔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때는 여비가 비쌌기 때문에 수학여행도 많은 사람이 올 수가 없었어요. 우리 집안이 엄청 잘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서울로 2번이나 여행을 올 수 있었어요. 서울 종로1가에 ‘화신상회’라고 있었어요. 그게 6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광화문에요. 그게 일본사람들이 6층짜리 건물을 쓰고 있었어요. 거기서 하모니카를 샀어요. 그때 처음 하모니카를 배웠지요. 지금도 하모니카를 들고 다니는데, 가끔 불고 그래요.

 

사진=최 어르신의 본적이 기록된 문서

Q. 뭔가 하모니카가 멋지게 느껴지네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되셨나요? 
일제 강점기(1910.8~1945.8) 때 국민(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에 입학하려 했는데 입학시험에 불합격이 된 거에요. 운동만 해가지고 공부할 줄을 몰랐지요. 그렇게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1년 동안 집에서 놀기만 했어요. 맨날 운동하고 놀기만 했지요. 학교 다닐 때 운동을 아주 잘했어요. 축구, 육상, 마라톤, 모두 학교 대표 선수였어요. 특히 달리기를 잘했어요. 학교 운동회에서 마지막 계주에서 전교생이 응원전을 하는데 ‘차이호껭(최 어르신의 일본 이름)’이라고 제 이름을 크게 외쳤었지요. 학교 이름은 ‘경신학교’였지요, 아마?

어느 날은 황해도에서 전국 도대항 육상 대회가 열렸어요. 우리 학교가 신천군의 대표였는데 내가 학교 대표로 나갔어요. 400m 계주였어요. 나는 꾀가 많아서 1번 주자로 뛰었는데 1등으로 출발했죠. 그런데 2번 선수가 넘어져 가지고 결국 1등을 못했지요. 아이고 참... 지금 생각해도 아까워요. 대회를 한다고 80리(32km)를 기차를 타고 갔지요. 그때의 기억이 많이 나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학교의 모습, 경남교육청 캡처

Q. 많이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차이호껭‘이라는 외침소리가 왠지 모르게 슬프게 들려요. 

그때 중학교에 못가서 집에 있는 중에, 누가 하는 얘기를 주워들었어요. 중국에 가면 돈 벌기가 쉽다는 거예요. 그때 부모님 돈을 몰래 훔쳐서 중국에 갔어요. (허허허...) 중국에 어디 거처가 있을까 살폈지요. 당시 외사촌 형님의 매부가 중국에 있었어요. 참, 신기하지요? 부모님께 얘기도 하지 않고 어린놈이 혼자 갔으니까, 간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했으니까.

기차를 타고 갔는데 신의주까지 가는 열차에는 항상 일본형사들이 있었어요. 뭐 때문이냐면 아편장사, 금 장사를 잡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나이가 어려서 여행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꾀를 냈죠. 신의주에서 내려서 (국민)학교 수학여행 갔을 때 들렀던 여관에 가서 잠을 잤지요. 그리고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당시에 신의주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신의주 사람 행세를 해서 몰래 건너갔지요. “나 신의주 사람이다”고 꾀를 냈어요. (허허허...) 

 

그렇게 만주에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외사촌 형님을 찾아갔어요. 형님이 중국의 길림(성)에 있었어요. 길림에 가면 한강같이 큰 강이 흘러요. 그 강이 ‘송하강’이에요. 송하강을 따라 80리(32km)를 올라가면 일본사람들이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우리 (친)형님이 그 발전 사무소에서 과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허허허... 참 기가 막히죠. 그래서 내가 찾아가니까 형님과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이 어린놈이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하면서 언능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랬죠. 갈 수 없다. 돈 벌러 왔다고. 밥 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그때 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등급이 나눠져 있었어요. 1등 국민, 2등 국민, 3등 국민이었지요. 사무소에서 일하는 일본사람들은 1등, 기술을 배워 일하는 한국 사람은 2등, 중국사람과 단순 노동자는 3등 국민으로 취급했어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 앞에서는 할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중국 사람은 짐승취급을 당했다니까요.

 

그런데 일을 하다가 도망을 가게 됐어요. 형님이 내 월급을 주지 않고 본인이 다 써버린거에요. 그때 생각이 나는데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노래가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100만원이 있으면 큰 성공으로 취급했었지요. 나는 고향에 어머님께 돈을 붙여드려야 하는데 (월급을 주지 않으니) 그럴 수가 없어 계속 있을 수 없었지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공장의 모습,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Q. 아이고... 또 그런 일이 왜...

그렇게 나와서 매부(외사촌 누님)집에 찾아갔어요. 매부는 당시 공의(중국당국이 인정한 의사)였어요. 다짜고짜 매부의 병원을 찾아갔어요. 내가 들어가니까 병원에서 어떤 병 때문에 왔냐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죠. 나는 병 때문이 아니고 내 매부를 만나려고 왔다고. 사실 나는 매부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어요. 얼굴도 모르고 찾으러 간 거지요. 허허허!... 매부는 나를 보더니 마차에 태워 누님을 만나게 해줬어요. 누님도 엄청 놀랬지요. 빨리 다시 돌아가라고 했어요. 여길 어떻게 왔냐고. 못 간다고 했죠. 

매부네 병원 밑에 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하는 치과가 있었어요. 거기에 부탁해서 잡일을 맡아 했어요. 처음에는 물건도 정리하고 시키는 일을 전부 다 했지요. 나는 지금도 이빨(인공치아)을 만들 수 있는데, 당시에 눈치껏 옆에서 보고 배웠어요. 그리고 조선(이북 고향)에 나올 때는 그 치과주인이 같이 우리 집에도 왔었어요. 한번은 치과 재료를 사서 중국에 가다가 세관에 잡혔어요. 일본형사들이 내가 가지고 간 재료가 아편인줄 알고 붙잡았어요. 그때가 아마 17~20세쯤이었지요. 생각해보면 참 웃겨요. 우리 아버지께서 가난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Q. 당시에 마음에 둔 여성분은 없으셨나요? (므흣한 웃음)

 

고향에서 18~20살 때 결혼을 했어요. 그 당시에 고향에 일본여자가 와 있다고 소문이 났었어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었어요, 매일 탔지요. 그래서 나도 같이 타는데, 너무 세련돼 보이고 예뻐서 마음에 들었지요. 그 사람이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는 일본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온 거에요.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지요. 이름은 ‘보끄 기미꼬’ 한국말을 잘 못했어요. 그때 동네에서 그 여자가 시집갈 사람은 “최00(최 어르신)” 밖에 없다며 사람들이 놀리고는 했어요. 같이 살면서 딸을 하나 낳았어요. 이름은 ‘최0희’에요. 물론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사진=일제강점시 당시 일본 여성의 모습,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Q. 아 그러셨군요... 그럼 남한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오시고 나서 6.25 전쟁이 터진 거죠?
아, 내가 얘기할게요. 그때도 교회 다녔는데 분단이 되고 나서 이북에는 ‘목사’가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나를 목사로 세울 작정으로 신학교에 보냈어요. 평양에 있는 감리신학교 기숙사에 살았는데 토요일이면 고향 교회에 가야만 했어요. 집까지는 200리(80km)였지요. 집에 갈 때도 올 때도 경찰서에 보고를 했어요. 보고를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 지도 몰랐어요. 그렇게 평양과 고향(신천)을 왔다 갔다 했지요.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다가 경찰서에서 통지서 하나를 받았어요. 내일 아침 9시까지 내무소로 들어오라는 하는 거예요. 갔는데 큰 종이가 있었어요. “인민군을 뽑으려고 불렀나?” 싶어서 잘 보니까 군인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교회 다닌다는 것을 알고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하는 거였어요. 신체검사를 하는데 신체에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만 확인을 하는 거에요. 거기에 내 신학생 이력이 다 있었지요. 그때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살고 싶어서 장로신학교에 있는 매부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매부가 “너는 왜 여기 남아서 쓸데없는 짓이냐 하고 있냐”고 하면서 “그따위 짓 하지 말고 다른 젊은 사람들처럼 이남으로 언능 내려가라“고 벌컥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살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Q. 정말 파란만장하셨네요.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셨어요...
그렇게 아는 분을 통해서 어떻게 탈북을 할 계획을 세웠어요. (최 어르신은 이전 일제징용 당시 아내였던 ‘기미꼬'와 ‘2살배기 딸’에게 고향에 가 있으라고 하고 헤어졌다고 했다. (그 이후에 탈북하면서 지금까지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남으로 오게 됐어요. 7명이 모여서 산을 넘었지요.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인민군에게 들켜서 다시 높은 뒷산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중에 1명은 붙잡혔고, 다른 1명은 아무리 불러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겨우 5명만 넘어왔지요.

 

넘어오는 중에 아기와 함께 온 여자들도 있었는데, 거기 황해도 사지원(탈북의 최전선)에서 아기가 울거나 하면 자기 아이를 죽이기도 했어요. 아 우는소리(애기 울음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잡히면 안 되니까... 

 

사진=탈북자 관련 영화 캡처

Q. 어떻게 그런 일이... 그후엔 어떻게 됐나요?

그렇게 남한에 넘어와서 청단이라는 도시에 있는 경찰서까지 걸어갔어요. 대한청년단의 감시를 받았어요. 조사를 받는데, 공민증(북한의 주민등록증)에 신학교 학생이란 기록이 있다보니 대우를 잘 받았어요. 조사 후에 ‘특무부대’로 넘겨졌어요. 특무부대(당시 공산당을 잡아내는 기관)는 당시 가장 무서운 곳이었지요. 거기에 가니까 나만 빼고 (신학교 학생이어서) 다른 분들은 다 밖에서 구타를 당했어요. 사상에 대한 조사를 받은 거지요. 그때가 25~26세였어요. 조사를 받고 원래는 개성에 있는 탈북자수용소에 가야하는데, 운이 좋았는지 바로 서울로 올라왔죠.

사진=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최 어르신

Q. 서울에 오셔서는 어떻게 되셨어요? 

 

서울에 조카사위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찾아갔지요. 그 사람이 과학 약품 상점에서 근무를 했었어요. 당시에 성냥을 만드는 약품이었어요. 그 근방에 가면 무역상회가 있는데 거기서 떼다가 파는 일을 같이 했어요. 각 공장마다 거기 와서 약품을 사갔어요. 조카사위가 거기에 취직을 시켜줬었으니까. 지금의 용산 경찰서 근처에 있어요. 당시에 철 수레를 끌고 일을 했어요. 이 조그만 몸으로 지금의 대방역, 영등포, 노량진을 끌고 다녔었어요. 당시 집에 없어서 처마 밑에서 자고 그러기도 했죠. 

 

어느 날 철 수레를 끌고 가는데 군인를 모집한다는 그거(포스터)를 봤어요. 그래서 잘됐다 싶었어요. 일본군 징병도 다녀왔으니 “군대는 잘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군에 입대를 했어요. 직접 가서 인사를 하고 이북한지 얼마 안됐는데 군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어요. 이력서를 써오라 해서 써서 가지고 갔지요. 이력서에 일본군 징병으로 군생활 경험이 있다고 하니 괜찮다고 그러더라고요. '650-1237'가 내 군번이에요.

 

사진=최 어르신의 군생활 당시 전역수첩과 문서

그렇게 전차를 타고 용산으로 갔어요. 육군본부 병참단 부대였는데 그때는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어요. (도착한 곳은) 수송부대였는데, 당시에 미군에서 차를 안줘서 교육을 못 받고 있어 가지고, 청량리에 가서 철도운전병으로 교육을 받았어요. 실습도 했는데 일주일에 세 번, 천안, 인천, 개성, 이런 식으로 했지요. 

 

군(군대)에 간지 1년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났지요. 6.25 전쟁 발발 당시에는 육군 병참단 부대의 ‘하사’로 있었어요. 부대로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전쟁이 났다고 하는 거예요. 서울 시내가 난리도 아니었어요. 내가 기억 나는 것이 용산역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후방에 있는 군인들이 용산역으로 엄청나게 왔어요. 

 

당시에 역에서 작은 주먹밥을 군인들에게 나눠졌어요. 또 어느 날은 보초를 서는데 하늘에 이북 비행기가 와서 여기저기에 폭탄을 이만큼씩 떨어뜨렸어요. 그래가지고 서울이 3일 만에 점령을 당했지요. 한강 다리가 끊어져 가지고 건너지 못한 군인들은 민간인 행세를 했어요. 군복을 입고 있으면 인민군이 다 죽여 버렸으니까. 

 

그때 내가 노량진에 도착하자마자 한강다리가 끊어졌어요. ‘노량진 전투’라는 노래도 있어요. 그러다가 육군 본부에서 부대에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수원, 천안, 대전을 지나서 그렇게 대구까지 후퇴를 했어요. 기관고(여관 뒤에 있는 철도 수리하는 공간)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보초를 섰어요. 그런데 또 북한이 쏜 포탄이 근처에 떨어져 가지고 동료들이 많이 죽었어요. 슬퍼할 정신도 없었지요. 

 

그러다가 한삼일이 지났나?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해서 서울을 다시 탈환했어요.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 소속부대가 특수부대여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갔어요. 참 편했지 그거 하나는. 

 

어느 날은 연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어떤 미군을 만나게 해줬어요. 그러더니 “하사관은 미군을 따라가라”고 해서, 미(미군) 10군단 사령부에 파견을 가게 됐어요. 당시에 동쪽은 한국군, 서쪽은 미군이 담당해서 싸우고 있었지요. 

 

파견 나가서 민군이 사용하고 있는 원산 도청 건물에서 복무했어요. 거기서 보일러 최고 책임자를 맡았어요. 겨울이 너무 추우니까 보일러가 없으면 생활할 수가 없었어요. 인민군이 민간인을 모두 데리고 도망을 가서 사람도 하나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몰래 도망 온 주민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건물에 광고를 써 붙였어요. 혹시 보일러를 뗐던 사람이 있으면 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모이더라고요. 그래서 보일러를 뗄 수가 있었죠.

당시 미군들이 나를 '헬로최'라고 부르면서 옆으로 오라고 했었어요. 파인애플을 먹이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키가 작고 하니까 자기들보다 어리다고 생각을 했나 봐요. 진급을 위해서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미군 간부가 가지 말라고 말렸었어요. 만약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미군부대에서 계속 근무 했을 거에요. 생각해보면 참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때, 미군에 있었으면 살림도 나아지고 인생도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그러다가 전쟁이 끝이 났지요. 

 

(인터뷰 종료)

 

최 어르신은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1962년 군에서 전역한 후에 생계를 위해 감귤장사를 시작했다. 새로 생긴 8식구를 먹어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대에서 전역하고 나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최 어르신은 인터뷰 중간마다 계속해서 나오는 눈물을 애써 집어 삼켰다. 그 눈물이 마치 자신도 모르게 살아 온 고난의 삶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생각해보면 진짜 신기해요. 내가 이렇게(이 나이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진짜 신기하다니까. 그렇지요? 내가 잘해서 살았다 하기보다도, 누가 나를 살려준 것 같아. 신이 살려주신 것 같다니까. 감사하지. 정말. 사람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해요. 그런데 그쪽(기자)이 나이가 몇 살이라고 했지?"

 

-6.25 참전용사, 최 어르신

 

인터뷰가 끝난 후 최 어르신을 배웅하기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저녁 6시를 앞둔 밖은 얇은 빗줄기 사이로 회색 안개가 가득했다. 작은 검은색 가방을 왼쪽 겨드랑이에 꼭 낀 최 어르신은 90도로 인사를 건네시며 청년보다도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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