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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연재] 한연의 비너스(3화), 욕망의 두 얼굴

글한상/소설한상

by 글로밥상 2020. 11. 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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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밥상=글로 나아가는 이] 

근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근아. 잘 지내니?”
“네, 뭐… 잘 지내죠.”
“그래, 다음에 또 전화할게”
“네”

불편했다. 근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이 아버지였다. 어릴 적 근의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무자비한 폭력에 근은 매일 집을 나서 공원을 배회했었다.

그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였다. 모 방송국의 국장이었던 아버지는 늘 스캔들에 휘말렸다. 일터에서 벌어진 루머라고 생각도 있었지만, 직접 목격한 뒤로는 그 생각을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함께 갔던 골프장에서 아버지는 매번 여성 캐디들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과장된 웃음은 자신의 성적충동을 합리화 하는 듯 보였다. 근은 생각했다.

‘수백평의 골프장을 걸으며 얼마나 많은 스침이 있었을까?’
 
근은 아버지와 통화 할 때마다 야한 소설을 읽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만났던 수많은 여성들이 방송국 국장실에서 밀회를 즐기진 않을까... 아들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내 옆에서, 아니 더 가까운 곳에서 나의 피를 물려준 존재가 그런 짓을 하다니... 하지만 근은 조금씩 커 가며 그를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은밀한 관계들은 일반적인 외도와는 달랐다. 위험한 관계지만, 아슬하게 그 사이를 잘 유지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버지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카페에서 일어섰다.

‘어제 만났던 그 아이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어디선가 걷고 있을까. 2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적당히 짧은 치마를 입은 채 걷고 있겠지. 근은 매끄러운 그녀의 다리를 상상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건 육체의 미를 넘어선 아름다움이었다. 근은 계속해서 그녀를 생각했다.

카페에서 나와 이어폰을 주섬주섬 꺼내 핸드폰과 연결했다. 어디론가 갈때, 마음을 편하게 먹고 싶을 땐 늘 이어폰을 꽂았다. 세상의 모든 잡념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아버지의 불륜과 본능에서 나오는 성적인 욕망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가을을 느끼며 그냥 걷고 싶었다. 검은색 코트가 가을 바람에 휘날렸다. 코트의 안감으로 스쳐가는 바짓단은 끝 없는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의 수면처럼 흔들렸다. 근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캠퍼스 곳곳에 펼쳐진 은행들은 구수하면서도 새콤한 향을 내고 있었다.

“아우, 똥 냄새“

지나는 학생들은 은행에서 똥 냄새가 난다며 투덜거렸다. 근은 은행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밝은 황금빛을 내며, 여기저기서 채도를 바꿔가며 떨어진 구슬처럼.

저게 금구슬이었다면 냄새가 나더라도 모든 이들이 저걸 줍기 위해 모여들겠지. 그리곤 서로 더 많이 줍겠다고 싸우다 누군가는 주먹에 맞아 기절할지도 몰라. 근은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상상한 장면은 꼭 그림으로 그려서 보관했다.

학생회관 옆 아동 앞에는 큰 광장이 있었다. 지식과 토론의 장이 돼야 할 대학교 답게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은 의미가 깊었다. 휴식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특이한 학생들은 햇빛이 강하게 내리는 날, 잔디 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뭇 학생들은 광장을 마음껏 누렸다. 근도 이곳을 지날 때는 뭔가 모를 설렘과 열정이 샘솟는 듯 느꼈다.

근은 가만히 서 광장 중앙에 선 한연의 비너스를 보았다. 밝게 웃고 있는 그녀는 웃으면서 동시에 울고 있었다. 가식을 떠는 인간의 웃음이 아닌, 진심이 담긴, 삶의 고난을 품은 웃음.

동상에 어떻게 감정을 담을 수 있을까?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아름다웠다. 근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말을 좋아했다. ‘아름답다’는 말은 예쁘다는 말과 달랐다. 예쁨은 자신의 페니스를 자극하거나 치골을 간지럽게 해주는 학교 안의 여성들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녀들이 창녀처럼 보여서가 아니었다. 아나운서처럼 조신한 인상과 성숙한 느낌을 주지 못해서도 아니다. 생각이 어려서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소화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어딘가 그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근은 이 캠퍼스 안에 자신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될 여인은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알아차린 근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입학동기 현철이었다.

‘야, 오늘, 패션디자인과 여자애들 2명이랑 한 잔 할래?, 학교 앞에 새로 생긴 술집 가보게.’

의미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다면 신선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여자들과 앉아, 남녀간의 헌신적인 사랑과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야 하는 이유 같은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눴겠지만, 오늘은 술로 밤을 지새고 싶지 않았다.

"미안, 나 오늘 좀 바빠." 

현철의 제안이라 거절하기 더 그랬지만, 근은 자신의 느낌을 따랐다. 핸드폰을 집어넣고 방으로 가려는데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검은 생머리를 한쪽 어깨로 넘긴 여성이었다.

그녀는 앉아서 한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느낌이 쌔했다. 귀신 같기도 하고 그냥 동상 같기도 했다. 근은 항상 아래 쪽에 앉아서 한비를 그렸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한번 담아보고 싶었으니까. 한비를 바라보던 여성은 잠시 후 자리를 떠났다.

높은 강의실에서 그릴지, 옥상에서 그릴지는 방에 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하늘에서는 여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흐릿한 날씨는 아동의 광장에 서 있는 한비를 더욱 신성하게 만들었다. 마치 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에 나오는 고대 그리스 신전의 모습과 흡사했다.

신들의 올림푸스 신전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들이 한비의 온몸을 스쳐갔다. 바람은 그녀의 회색 팔꿈치를 핥고 있었다. 하지만 한비는 흥분하지 않았다. 떨어진 빗방울들은 한비의 눈가를 촉촉히 적셨고, 한비의 눈은 떠나가는 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랜 밤의 추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밤은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한비는 알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근은 다른 어떠한 일을 하기 전, 먼저 손을 씻었다. 지독한 강박에 사로 잡혀 병적인 결벽증까진 아니었지만, 손을 자주 씻었다. 하루에 30번 정도.

기름기가 있는 손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종이에 검은 기름때가 묻어 나오는 것은 그에게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근은 그림을 그리기 전 샤워를 하고 몸을 편안히 만들었다.

다큐 채널에 등장하는 유명 작가들은 괴상한 집필 방법을 소개했다. 근의 고집도 그런 것들 중 하나에 속했다. 나체로 글을 쓰는 소설가, 여성의 벗은 척추 사진 위에서 작업을 하는 화가,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만 집필을 하는 극작가와 같이, 이보다 훨씬 특이한 예술가들이 많았다. 세상은 재밌는 곳이었다.

손을 씻은 근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제 청소를 했지만 방은 금새 또 더러워졌다. 근은 작년에 봤던 손배우 주연의 영화 ‘술래잡기’처럼,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했다.

종아리에서 허벅지를 타고 소름이 올랐다. 그 영화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온 사회를 ‘불안 공포’에 순식간에 떨게 만든 작품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끝이 없고 가끔은 정말 기괴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실제로 소문난 범죄자 중에는 뛰어난 에술적인 감각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근은 ‘하느님이 세상을 어지러운 미로처럼 만들어서 그런가?’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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