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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독후감] 지금도 병마와 싸우고 있을 당신께 '조현병을 이겨낸 심리학자가 전하는 삶의 찬가'

책찌개/감성독후감

by 글로밥상 2021. 2. 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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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밥상=글로 나아가는 이] 

몇 년 전 조현병을 앓는 한 남자의 범죄가 뉴스에 보도됐다. 끔찍한 범행 현장에 대중은 공분했고 법과 여론은 그를 강하게 질타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범행 동기에 대해 여러 담론이 있었지만, 그가 수년간 조현병 치료를 받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가 앓은 조현병은 어떤 병이고 그의 행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하고. 


정신 질환의 하나라고 하는 ‘조현병’은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 환자의 수는 계속해서 늘고 있다. 그만큼 사회가 우리의 정신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벌써 몇 년째 아팠고,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으며, 신경이완제를 복용하고 있었고, 수년간 치료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혼자 살지 못했다. 병원 밖에서 잠깐 산책하는 일조차 무리였다. 그녀는 결정적으로 자신만의 통계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다시 건강해져서 활동적이고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심리학자로서 일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는, 병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꼭 통계대로 되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그녀도 자기 말이 반드시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내 말이 옳을 확률이 단지 100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이로써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1000명 중 단 한 명만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진실이 너무나 잔인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999명의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바로 그 한 명이 될 수도 있었다. 

스콧의 연구는 경계에서 단지 2퍼센트가 높아 실명이 아니라 시각장애로 구분된 사람들이 어떤 기대를 갖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삶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이 꼭 매달릴 수 있는 꿈, 그리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목표가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이때 통계와 확률은 의미를 잃는다. 나는 아픈 데다 내 삶의 상황과 진단을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그냥 지정됐다. 하지만 이를 나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대부분은 단순히 통계에 집중해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네 목표를 이룰 가능성은 희박해.” 

하지만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해. 항상 좋아질 기회는 있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면 말이야.”

이 두 가지 말은 똑같이 ‘참’이다. 하지만 이 둘은 매우 큰 차이가 나는 두 가지 효과를 불러오고, 완전히 다른 것을 표현한다. 하나는 굉장히 희망적이지만, 다른 하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항상 희망이 있는 진실 쪽을 고를 것이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것이 건강에 가장 좋으며, 마음에도 가장 적은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中


병마와 고군분투했던 저자의 내면 묘사가 마음 깊이 사무쳤다. 직접 아프지 않으면 누구도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저자는 누구보다 아팠고 치열했으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막연하더라도 삶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의 상처, 정신적 아픔 등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근 몇 년 간 심리서적, 심리 관련 콘텐츠가 급속히 늘어난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정신의 병이 생긴 이들이 많아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둔감하다. 내 말 한 마디, 글 한 줄, 눈빛 하나가 누군가에게, 그리고 또 다른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이제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칭찬과 관심 등 다른 사람과의 긍정적이 경험을 할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때로는  참을성이 강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때로는 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따라서 환자나 의사, 가족이나 다른 사회 구성원 등, 각자의 역할에 상관없이 모두가 단지 사람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다시 말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때로는 똑똑하게 성공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리고 적법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 넝쿨이라도 1월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난 엉클어진 나뭇가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장미는 원래 그렇다. 우리는 이런 시기에는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해서는 안 되며, 시험을 치르지도 말아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中 

지나친 강박, 의무감, 부담감 등은 우리를 위축시킨다. 정도가 심해진 채 해소가 되지 않으면 정신적 고통이 따른다. 내가 들 수 없는 무게를 오래 지면 몸이 지치는 것처럼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무조건 쉬거나 멈춰야만 하는 건 아니다. 물론 큰 아픔이 있을 땐 휴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벅차서 힘이 부족한 거라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음의 짐을 같이 져 주는 행동이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말 한 마디가 말이다. 

 

꼭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는 존재지, 완전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어느 날 신이 돼 모든 게 변한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힘들고 아프고 쓰러질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쓰러진다는 건 원래 살아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방법을 찾고 움직이면 된다. 

 

 

다른 대학 동기는 내 과거를 알고 나서 변형된 형태의 또 다른 낙인을 내놓았다. 그 동기는 내가 겪은 힘든 일을 통해 분명 매우 상냥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했으며, 내가 극복해야만 했던 저항을 통해 고상해졌을 거라고 말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흥미진진하지만, 당연히 이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쓰러져버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점을 발전시키기 위해 꾸중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꾸중 때문에 비참해지고 편협해지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피해를 입은 상태로 지내기도 한다. 정신질환을 겪은 사람이나 현재 겪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시한폭탄보다 위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무조건 나은 경우도 거의 없다. 이들은, 아니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보통 사람이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中

“고생을 많이 해 봐야 그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 선생님께 많이 들었던 말이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물론 이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직접 몸으로 하는 경험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좋은 삶의 원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을 무작정 아무에게나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지금 세상에는 병마, 어려운 환경, 상처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생을 피해가야 한다. 때로는 그 고생을 피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진정한 경험이 되기도 하니까. 

 

“권력을 쓰는 일은 쉽다. 하지만 그것에서 음악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라던 안드레 비예르케의 말이 맞았다. 나에게 강요했던 사람들의 방식이 옳았다면 그들에게 협조했을지도 모르겠다. 강요는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심사숙고해서 내놓은 강제조치, 심혈을 기울인 최고의 신중함에 협조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자존감을 확실히 덜 떨어트리고, 더 많은 희망과 존엄함을 준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내가 여전히 나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정의를 갖춘다면, 나를 대하는 일도 더욱 쉬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中

‘희망’이라는 불씨를 지피기엔 너무나 추운 요즘, 이 겨울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누군가는 이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것이고, 누군간 날아가지 않으려 버팀목을 꼭 붙잡고 있을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삶의 ‘희망’만큼은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올해는 조금이나마 모두의 사정이 나아지기를 바라본다. 

 

우리가 모두 앉고 있는 이 악한 병을 이겨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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