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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서적리뷰]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가 있다고?”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드 보통

책찌개/감성독후감

by 글로밥상 2021. 6. 2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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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드 보통은 공동체 정신이 붕괴된 현대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니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사회적 소외를 극복하고 사랑과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공동체 정신과 인간성을 회복하는 지혜와 희망을 철학이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드 종교


사진=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드 보통


"신은 죽었을까?"

한없이 무료한 일상 속에서도 우린 때로 신에 대한 상상을 한다. 그 신은 꼭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부처님, 알라'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바라는 '무언가'로 나타난다.

사진=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포세이돈'

사진=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비너스'

(이를테면 돈, 이성, 아이돌, 어떤 물품, 사상 등으로 나타난다. 일부 종교에서는 '유일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섬기는 이같은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칭한다)

지금은 과학과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21세기다. 4차 산업혁명을 넘어 5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이 때, '무신론자'가 되지 않는 길은 어쩌면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는 데이터(Data)로 모든 걸 설명하고 보이며, 심지어는 인간의 마음과 성향까지도 데이터 기반의 플랫폼(Platform)으로 증명해 보인다.

이 가운데 '종교'를 믿는 이유는 무엇이며, 종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종교는 정말 필요하며, 종교가 말하는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알랭드 보통이 말하는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과연 무엇일까.


종교란 하늘나라에서 인간에서 내려준 것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우리가 버리게 될 때, 문제는 더욱 흥미로워질 수 있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中, 알랭드 보통

드 보통은 종교를 아주 신성한 것으로 보거나, 종교를 전혀 가치가 없는 엉터리라고 보는 극단적 사고를 경계했다.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 '종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주목한 가장 큰 부분은, 세속 사회에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병패들을 종교가 가진 특성을 통해 해결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열린 사고로 종교를 바라보았다.

사진=예수 그리스도 삽화

인간이 종교를 가지고 믿는 이유는 그 종교를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사실 자신을 위한 '이기'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물론 일부 종교는 믿음의 마지막 단계로 '순수한 믿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현대 무신론의 오류는 어떤 신앙의 핵심 교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는 신앙의 측면들이 무척 많다는 점은 간과한 데에 있다. 우리가 종교에 굴복할 수밖에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종교를 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을 일단 버리고 나면, 우리는 종교라는 것이 갖가지 정교한 개념들의 저장고임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속적 생활의 가장 끈질기고도 대책이 없는 질환들 가운데 몇 가지를 완화시키는 일에서 그 개념들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中, 알랭드 보통

종교가 나에게 혹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좀 더 긍정적으로 바뀔지 모른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은 급격히 늘었고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종교활동의 핵심인 예배 또한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비대면 예배, 모임으로 대체하고 있긴 하지만 그 깊이와 유대감은 대면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공동체 보단 개인이, 정신보다는 물질이, 이타보다는 이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형식만으로라도 공동체를 강조해왔던 종교의 몰락은 결코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드 보통은 그나마 종교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의식'들을 분석하며 '종교'가 현대에 줄 수 있는 답을 찾으려 했다.


현대사회에서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는 방법의 핵심에는 각자의 일에서의 성공에 대한 찬양이 놓여있다. 어떤 파티에서 맨처음 받는 질문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일 때에, 우리는 그 공동체의 출입문에 맞닥뜨렸음을 직감한다. 즉 이 질문을 받고 우리가 내놓는 답변에 따라서, 우리가 저 하찮은 작자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을지, 아니면 결정적으로 버림을 받을지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쟁적이고 사이비 공동체적인 모임에서는 우리의 속성들 중에서 겨우 몇 가지만 유효한 화폐가, 즉 낯선 사람의 호의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은 수준의 차별을 고려해볼 때, 우리 중 상당수가 자기 일에 극단적으로 몰두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 다른 것은 거의 모두 버리면서까지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상당히 그럴듯한 전략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의 세계는 일터에서의 성취가 곧 물리적 생존을 위한 경제적 수단을 확보하고, 나아가서 정신적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인 타인의 관심을 확보한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中, 알랭드 보통

자본주의('물질'과 '부'의 축적을 가장 우선시 하는 사상) 사회에서 곧 물질을 버는 수단인 '직업'과 쌓은 '부'는 모든 판단의 척도가 된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루에도 수억번 쏟아지는 '뉴스'에는 '돈'과 '돈을 버는 수단'에 대한 찬양이 장사진을 이룬다. 이는 슬픈 현실이지만 사실이다.

드 보통은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가?

이와 다르게, 기독교 경전인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은 '돈'과 '탐욕'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처럼 말이다.

기독교는 '가진 것'과 '보여지는 것'을 떠나서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또한 '배척과 이기'를 넘어 '수용과 평등'을 마음에 심으라고 말한다.

위와 같은 현실과 다르게, 우리는 모두 '신(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앞에 똑같은 인간이고 평등하다는 말이다.


원죄의 교리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혐오스러운 결함이 인간이라는 종의 불가피한 특성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고 독려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결함들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냉정한 정신으로 그런 결함들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우리가 부끄러워할 이유를 조금이라도 더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면, 부끄러움 그 자체는 우리를 짓누르는 감정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 이 교리에는 잘 나타나 있다.

 

(중략)

 

나아가서 원죄에 대한 강조는 민주주의 시대에 도덕적 조언을 나누어줄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데도 도움이 된다. “당신이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라는 격앙된 질문을 받을 경우, 기독교 신자는 다음과 같이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답변을 하기만 하면 된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상, 즉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불안이며, 죄악을 향한 유혹이며, 사랑을 향한 열망이며, 순수를 향한 이따금씩의 동경이 똑같이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中, 알랭드 보통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말. 기독교는 이를 굉장히 강조한다. (훗날 알게 됐지만 이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아담이 지은 죄[원죄]와 연관성이 있다)

사실 필자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경쟁구조 속에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현대인들에게 자꾸 '죄인'이니까 뭘 해야한다, 믿어야 한다고 하다보니, 들을 때마다 신물이 났다. 사람을 꾀기 위한 선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을 살면서 큰 어려움이나 상심을 겪게 될 때마다 '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법에 따라 그 '죗값'을 받는다. 원하지 않는 일상의 고통은 왜 우리에게 늘 존재하냐는 것이다.


또한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우리의 공공장소는 중립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 공간은-어떤 번화가를 얼핏 둘러보아도 알 수 있듯이–상업적인 메시지로 뒤덮여 있다. 심지어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내버려두려고 노력하는 사회에서조차도, 우리의 정신은 계속해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거의 깨닫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조종당하고 있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中, 알랭드 보통

“대학의 목적은 유능한 변호사나 의사나 기술자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능력 있고 교양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또는 매슈 아널드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적절한 문화 교육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 인간의 혼란을 제거하고 인간의 불행을 감소시키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고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교육의 가장 야심만만한 목표는 “이 세상을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훌륭하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는 고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中, 알랭드 보통


종교에 대한 의문, 삶과 죽음, 인간의 구원과 심판, 사후세계, 영생과 영벌 같은 어려운 질문을 우리는 이제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질문을 하면 '사이비'라며 배척을 받고 사회에서 외면 당할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드 보통'과 같이 더 낫고, 조금이라도 선한 사회를 위해 이런 질문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문화를 통한 접근이 됐든, 종교를 통한 배움이 됐든, 경험이 됐든, 누구에게나 이런 질문을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길에서 조심히 말을 걸어오는 낯선 행인의 얘기를 들어줄 일말의 여유도, 배려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정말 슬픈 사실은 여기에 있다. 그 끝이 배신이나 아픔이더라도, 순수한 '배려와 관심'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으니까.

그는 사기꾼이나 사이비 신도일수도, 잃어버린 나의 단짝이나 나를 성공하게 해줄 어떤 동료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누구든 개의치 않는다. 왜냐면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지닌 위력은 그리스도가 이제껏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었다는 주장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그는 질병과 슬픔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향해서,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은 단지 그들만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 것이었다. 비록 고통 자체를 면제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흔치 않은 형벌이 왜 나에게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패배감만큼은 면제해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배신, 고독, 자신감, 상실, 고문 등의 고통의 목록이나 다름없으며, 우리는 이를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거울에 비춰보고 어떤 상황에 놓을 수 있으며, 자신의 고통이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잘못된 인식을 하기 쉬운 까닭은, 한편으로 이 사회에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서 단호하게 손을 내젓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 감상적인 광고 이미지를 사방에 늘어놓아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약속으로부터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절감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中, 알랭드 보통

누군가의 사연을 들어줄 여유도 없는 이에게 믿음을 권장하고 교리를 가르친다는 건, 어쩌면 '소귀에 경읽기'일지도 모르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여전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틀림없다.

이런 말이 떠오른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내가 모른다고 해서 그 사실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걸 잊고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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