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의 적정심리학, 당신이 옳다
사진=-정혜신 박사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은 버티고 버티다가 의사에게 기댈 수 밖에 없겠다 싶은 심정이 되었을 때 병원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자신에게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며 환자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마음. 백기투항하는 심정으로 온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진료실에서 의사-환자의 관계는
의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관계, 의사 중심의 관계라는 걸 의미한다.
진료실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사람은 자신의 매력을 보이고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다.
그런 일상의 공간에서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으려면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글로 나아가는 이] 마음이 아픈 이들이 정신과 의사 없이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스스로) 힘든 부분을 충분히 공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군다나 요즘처럼 누군가를 만나기가 어려운 시기에는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존재와의 단절로 인해 마음이 힘든 이들이 점점 늘고 있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없는 상황이다. 가족이라 친구라 해서 전부 해결해 줄 수도 없다.
그렇담 고액의 상담료를 내고 심리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것은 부담스럽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너무 깊지 않더라도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기 공감'과 '자기 치유'다.
저자 정혜신은 '적정심리학'에 대해 "모두가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집밥 같은 심리학'"이라고 말한다.
집밥 같은 심리상담법이 생긴다면, 정말 많은 이들이 쉽고 가볍게 자기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다. 사람의 본질, 상처의 본질을 알고 움직이는 사람만이 치유자일 수 있는 곳. 그곳이 트라우마 현장이다. 외형이 아름다운 품새 무술이 아니라 위력이 최우선인 실전 무술이 이기는 살벌한 싸움터다.
사회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깊은 상처부터 순식간에 온 삶이 뻘 속에 패대기쳐진 트라우마 피해자의 상처를 동시에 만나면서 깨달았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도 어떤 외부적인 조건과도 무관하게 작동하는 인간 마음의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천안함 피격,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는 어떤 충고와 판단도 마음에 스며들지 않는다. 어줍잖은 위로는 도리어 그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다.
심리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유족들에게 접근하기엔, 마음의 벽이 너무도 높다. 그들은 마음이 병든 환자가 아니다. 앉혀놓고 "당신은 환자이기 때문에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봤자 반감만 커질 뿐이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일까. 가장 쉽지만 가장 어려운 일. 그건 바로 그들의 옆에서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아무 말 없이 걷고, 뛰고, 식량을 끓이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존재이다.
직장생활이든 감옥 생활이든, 부자든 빈자든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나 집중을 받는 경험이 적으니 사람들은 아플 수 밖에 없다. 총전기를 한번도 만나지 못한 배터리처럼 내 존재 자체가 계속 방전만 거듭하다 꺼져간다.
방전의 종착점에 서 있는 사람의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이고 몸은 탈진 상태다.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살아지지도 않는다.
치솟는 자살률과 추락하는 출산률은 그렇게 생명과 멀어지고 있는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받아볼 수 없는 주목이다. 우리는 외모, 가족, 직업, 성과, 재산, 이력 등에 대해선 쉽게 주목하고 박수를 치지만, 존재 자체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회사나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얼마나 받아보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가족 사이에서도 그렇다. 가족 구성원 내에서의 역할과 위치, 헌신만을 강조하게 된다.
나 자신을 구성하는 생각, 기억, 감정(보통 보이지 않는 부분이 대다수다)에 대해서 말할 기회는 많지 않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의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 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감정에 관심이 없다면, '감정'을 다룰 줄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감정'이 고장났을 때다. 감정을 어떻게 느껴야할 지, 수용하거나 표현할 지 모른다면 그 감정의 여파는 고스란이 마음에 남게 된다.
감정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분명 힘든 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다. 감정을 없애기 위해 습관적으로 뭔가를 하겠지만, 감정은 그렇게 '뿅'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 초조하지 않을 수 없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감정에 대한 인정과 포용,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다른 외부요인을 제외한 오직 '감정'에 대한 반응이 돼야 한다. 더 쉽게 말하면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누구든 충분히 공감받게 되면, 굳이 다른 걸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누구에게든 "어떠한 조건과도 상관없이 자신이 수용받고 있다"는 느낌은 중요하다. 외모, 성과와 같은 조건이 충족됐을 때만 수용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은 그곳에 더 이상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그 수용의 대상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감정'이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게으른 시선은 큰 독의 작은 구멍이다. 결국 둑 전체를 무너트린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국가와 국경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계가 존재한다. 국경 수비대가 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경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지키는 일이 어렵다. 그 경계를 인지할 수 있어야만 나도 지키고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것, 사람을 존재 그 자체로 수용하고 공감하는 일이 치유의 근원이라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명제가 두려울 만큼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것, 사람을 존재 그 자체로 수용하고 공감하는 일이 치유의 근원이라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명제가 두려울 만큼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관계에서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아직 열리지 않은 상대의 영역을 지켜주는 것이다. 보통 이를 '프라이빗 존'이라고 하는데, 이를 넘어서면 사람들은 심리적 불편함을 느낀다. 심한 경우엔 자신의 마음을 침범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은 이 프라이빗 존을 잘 파악하고, 절대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깊은 배려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어도 일방적인 계몽과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 뿐이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당신이 옳다 中, 정혜신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옳은 말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 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그와 일치하지 않는 감정 때문에 힘들어한다.
충분히 공감받고 자기자신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알아서 옳은 것이 무잇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역할에 충실한 관계란
‘모름지기 주부란, 아내란, 엄마란, 며느니란 이러이러해야 한다.’
‘모름지기 가장이랑, 아빠란, 아들이란, 사위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이다. 역할놀이 중인 삶이다. 이런 삶, 이런 관계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내 심리적 S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한번도 그의 속살을 본 적이 없는 삶이다.
당신이 옳다中, 정혜신
안전하다는 느낌만 있으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얘기보다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자기 얘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낯선 상황이나 낯선 사람이라도 어떤식으로든 그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어서다.
당신이 옳다中, 정혜신
감정이 아픈 사람들이 유난히 많아지는 요즘이다. 어디서 내 얘기를 털어놓을 수도 없고, 수용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앞길이 답답해진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내 마음(여기서의 마음은 감정을 말한다)을 돌봐주고, 조금 여유가 된다면 주변 사람의 감정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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