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리였다. 불과 일주일 전에 근에게 카카오톡을 지겹도록 보냈던 여자. 근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서 가장 불편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그들은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오빠, 바쁘다더니 여기서 여자 꼬실 생각이나 하고 있었네요?”
“마음대로 생각해.”
근은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말이 많았다. 근에게는 불편한 자리였지만, 현철은 애리의 친구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에 대한 칭찬부터 사고방식에 대한 공감까지 다양한 대화였다.
“벌써 여섯 병이나 마셨네?”
“그러게 오빠!? 우리 많이 마셨네?”
현철과 애리의 친구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 둘 사이에는 어떠한 긴장감도 없는 킬링 타임용 대화만 오가고 있었다. 섹슈얼한 분위기는 없었다. 그냥 재밌어 보일 뿐이었다.
반면, 반대편의 두 사람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타고난 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존재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모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근은 그녀와 어떠한 정신적 교감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애리에게 근은 파헤치고 싶은 미지의 섬 같은 남자였다. 그 미지의 섬에는 아직까지 인류에게 발견되지 않은 많은 감정들이 있었다. 애리는 그것들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오빠, 오빠는 왜 자꾸 날 피해요?”
“뭐?”
“왜 자꾸 날 피하냐구요.”
“나는 널 피한 적 없어. 난 평소대로 행동했을 뿐이야, 네가 편안한 내 생활에 변화를 주려고 한 거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랑 장난하자는 거에요?”
“난 장난한 적 없어."
상당히 저돌적이었다. 애리는 근에게 입을 맞췄다. 근은 키스한 그녀의 입술에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입맞춤이었다. 근은 동요하지 않았다. 입을 뗀 후 한잔 가득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워줬다. 아주 깊숙하게.
애리는 근의 손목에서 그리고 점점 차오르는 잔 안에서 강한 욕정을 느꼈다.
“이제 가자. 늦었어.”
현철과 애리 친구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근의 단호한 태도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애리는 민망한 듯 가방을 빠르게 집어 들었다.
“가자.”
현철은 서둘러 애리 친구와 전화번호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뒤따라가는 그녀의 꽁무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근은 현철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현철은 괜한 노파심이 났다. 근의 태도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냐? 그냥 재밌게 좀 놀다 가면 안되는 거야?”
“너나 놀다 가”
근은 현철을 뒤로하고 나왔다. 근은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얄팍한 욕망 따위에 놀아났다는 자신이 미워서도,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자신만 진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근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들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싶었다.
근은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걷는 동안,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를 떠올리면 공기가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 누구도 자신을 위로해줄 수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었다.
방에 도착한 근은 그녀를 찾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페이스 북에 그녀의 이름을 쳐보고, 성학과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몇 번의 검색을 통해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한연대학교 성학과 전임 교수, 인애희’
근은 안심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일단 안심했다. 혹시라도 꿈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평범한 일상의 생활 모습과, 몇 개의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하나의 글이 그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그녀에게 집중하다보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한 참 넘어 있었다.
‘그를 만났다. 아주 오래 전의 모습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별을 겪은 뒤에 흔하게 올리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기, 안녕하세요. 저 김근이라고, 어제 만났던...“
근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에게서 바로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기다리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근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얼굴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딱 한번 만났던 사람이었다.
“뭐, 이 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근은 스스로 중얼거렸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서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온 몸이 뻐근하고 나른했다. 근은 몸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살며시 잠을 청했다.
의식이 흐려지고, 몸은 점점 기력을 잃어갔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띠링!’
귀에 박히는 경쾌한 소리, 근은 눈을 떴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겠지만, 왠지 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작은 설렘이 그를 자극했다. 핸드폰을 들고, 화면 위쪽을 알림을 유심히 살폈다. 이상한 다운로드 메시지가 먼저 와 있었지만, 근은 빨리 스킵하고 다음 알림을 보았다.
기다리던 페이스북 메시지였다. 발송자는 인애희였다.
‘그래. 안녕.’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근은 그녀가 좀 더 반겨주기를 바랬지만, 답장이 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뭐해요?“
“그냥, 있지. 뭐,,,”
“무뚝뚝하네요. 많이.”
"그래. 그런데...“
“네?”
“우린 연락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근은 당황스러웠다. 100일 사귄 여자친구에게 갑작스런 이별통보를 받은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근은 조심스럽게 물어보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빼고 타이핑 속도를 낮췄다.
“왜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설렘에 가득 차 있었던 그에게, 사형선고 같은 말이었다. 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적이 처음이었기도 하고, 낮선 공간 안에 혼자 갇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 할 순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서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왜 그런지 가리켜 줄 순 없는 건가요? 혹시 제가 학생이고 당신은 교수라서 그런 건가요?”
“그런 게 아니야.”
신기하게도 그녀는 근이 무슨 말을 할 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근의 글이 오르자마자 바로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근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뭐죠? 도대체가? 왜 연락도 하지 말자는 거죠?”
“모르는 게 좋아. 네가 지금 누리는 물처럼 흘러가는 편안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면...”
“네? 도대체가 그게 무슨 말인지.”
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은 속으로 생각했다.
‘편안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면, 연락하지 말자고? 무슨 첩보영화라도 되는가?’
남자 대학생이 여교수 한명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아무리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연애관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 해도, 나이와 직업, 신분을 따지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관념이었다.
근은 그녀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근은 그녀를 ‘한연의 비너스‘ 같은 이상적인 여성상이라고 믿었지만, 그녀가 꽉 막히고 겉만 번지르르한 명문대 여교수라고 생각하니, 배신감이 치밀었다. 사실 애희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의미심장한 얘기를 통해 근을 조금 혼란스럽게 한 것은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충분이 있을 수 있는 남녀 간의 밀고 당기기 정도였다.
다만 근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운 경험이었고, 그 세상에 다시 갈 수 없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근이 혼자서 좌절하는 동안 애희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다.
“미안해, 나도 쉽게 생각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근은 도저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간 정신병자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성학을 전공한 여자들은 다 이런가?’
근은 별의 별 상상을 다했다. 혹시 의처증이 심한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가, 아니면 수많은 남학생들과의 스캔들이 있는 건 아닐까 등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었다.
다시 페이스북 메시지 음이 울렸다.
“네가... 정말 나랑 계속 만나고 싶다면 얘기해줄게. 하지만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다음에도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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